쌍사자석등 백년 유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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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사자석등 백년 유랑기

광양에서 다시 주목받은 석등

통일신라의 뛰어난 석조 문화유산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이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최근 문화축제인 2026 국중박 분장놀이에서 광양 청년팀이 이 석등을 표현한 ‘국보급사자들’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다.

두 마리 사자가 석등을 받치는 독특한 모습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석등의 역사는 아름다운 외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광양을 떠나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닌 약 100년의 유랑과 이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려는 지역사회의 노력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광양역사문화관에서 만나는 모형

광양역사문화관에 들어서면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을 재현한 모형이 관람객을 맞는다. 실제 크기와 비슷하게 만든 모형은 로비에서 웅장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두 사자가 마주 선 채 석등을 받치는 구조와 전체적인 비례도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광양역사문화관에는 광양시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해 석등과 관련한 문화 해설을 제공한다. 전시 공간에 자리한 대형 모형은 이 석등이 광양의 역사와 문화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쌍사자 석등의 흔적은 광양역사문화관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옥룡면 중흥사 경내에도 석등 모형이 놓여 있어 본래 석등이 존재했던 지역과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현재 중흥사와 옛 절터의 차이

다만 현재의 중흥사를 통일신라 시대 석등이 세워졌던 옛 사찰 건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옛 사찰은 지금 터만 남아 있으며, 현재의 중흥사는 훗날 다시 세워진 곳이다.

중흥산성 일대는 석등의 본래 자리를 이해하는 핵심 공간이지만, 오늘날의 사찰 건물이 곧 당시 건물은 아니다. 이 차이를 알고 현장을 살펴보면 모형이 놓인 의미와 석등의 이동 경로를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재 진품 석등은 광양이 아니라 국립광주박물관 전시실에 있다. 본래 자리에서 시작된 석등의 긴 이동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부터 본격화됐다.

통일신라에서 이어진 오랜 시간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은 통일신라 무렵 중흥산성 안의 암자에서 3층 석탑과 함께 자리했던 석등이다. 오랫동안 같은 곳을 지켰지만, 높은 문화적 가치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반출 위험에 놓였다.

석등을 둘러싼 첫 위기는 1930년에 발생했다. 옥룡면 보통학교 후원회가 학교 기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토지 소유자도 모르게 부산의 골동품상에게 석등을 헐값에 넘기려 했다. 은밀하게 추진됐던 매각은 뒤늦게 위법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철회됐다.

이에 따라 첫 반출 시도는 중단됐다. 하지만 석등의 가치가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다.

1931년 야간 반출 시도

이듬해인 1931년에는 더욱 직접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인 수집가이자 도굴꾼으로 알려진 오구라 다케노스케와 부산 골동품상의 사주를 받은 도굴꾼들이 밤중에 석등을 해체해 빼내려 한 것이다.

도굴꾼들은 석등에 밧줄을 매달아 무단으로 해체하고 반출하려 했다. 그러나 현장을 발견한 마을 주민들로 인해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지역 주민들의 발견으로 석등이 곧바로 사라지는 상황은 막았지만, 사건 이후 석등은 본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두 차례 반출 위기를 넘긴 석등은 결국 보호라는 명분 아래 고향 광양을 떠나게 됐다.

1932년 시작된 긴 이동

1931년 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가 개입했고, 석등은 1932년 경복궁 자경전 앞으로 강제 이전됐다. 중흥산성 일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석등이 광양을 떠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광복 이후에도 석등은 본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경무대인 현재의 청와대와 덕수궁을 거쳤고, 다시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한 장소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이동이 반복되면서 석등의 유랑도 계속됐다.

석등의 이동은 단순한 장소 변경이 아니었다. 중흥산성의 옛터, 함께 자리했던 3층 석탑, 석등을 지켜본 마을 공동체와 떨어지는 과정이었다. 광복 뒤에도 귀향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광양 시민들에게는 오랜 과제로 남았다.

1990년 국립광주박물관 이전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90년이었다. 호남 지역에서 출토된 문화재를 지역으로 돌려보내려는 움직임에 따라 석등이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이전됐다. 1932년 광양을 떠난 뒤 여러 장소를 거친 석등은 호남권 박물관 전시실에서 안정을 찾았다.

현재 석등은 국립광주박물관 전시실에 보존돼 있다. 관람객들은 두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독창적인 구조와 통일신라 석조 예술의 면모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광양에서는 국립광주박물관 이전을 유랑의 완전한 끝으로 보지 않는다. 석등이 처음 세워졌던 중흥산성의 역사적 맥락과 현재 전시 장소가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광양시의 제자리 찾기 노력

광양시는 고향사랑기부제 제1호 기금사업으로 국보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제자리 찾기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광양을 떠난 석등을 본래 지역으로 되돌려 오려는 시민적 관심을 모으기 위한 사업이다.

이 움직임은 석등 한 점의 이동만을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석등이 세워졌던 장소와 역사적 배경을 함께 보존하고, 광양의 문화유산으로서 의미를 온전히 알리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

광양역사문화관과 옥룡면 중흥사에 마련된 모형도 이러한 흐름을 보여준다. 진품이 지역을 떠나 있는 상황에서 시민과 방문객이 석등의 형태와 역사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현장에서는 모형의 규모와 두 사자의 생동감 있는 자세가 관람객의 시선을 끌며, 석등이 지나온 시간을 차분히 되돌아보게 한다.

끝나지 않은 귀향의 과제

국보 제103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이어진 문화유산이다. 1930년 매각 시도와 1931년 야간 반출 사건을 겪었고, 1932년 경복궁으로 강제 이전됐다. 광복 이후에는 경무대와 덕수궁, 경복궁을 차례로 거쳤으며 1990년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석등은 현재 안전한 전시 환경에서 관람객을 만나고 있다. 동시에 광양에서는 본래 자리와 문화재를 다시 잇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약 100년에 걸친 이동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은 석등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문화유산이 장소와 함께 지니는 의미를 살피는 과정이기도 하다.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의 역사는 과거에 멈춰 있지 않다. 석등이 광양을 떠난 과정과 제자리 찾기 운동은 오늘날 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기억할 것인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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