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이 마을을 잇다

가을 저녁 월인담화에 모인 사람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저녁, 광양읍의 월인담화에서는 아이와 어른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글을 쓰는 같이 한 문장, 마을을 잇는 글쓰기 프로그램이 열렸다. 월인담화는 ‘달이 비추는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뜻을 담은 공간이다.
이번 프로그램은 가을 동안 모두 세 차례 진행된다. 저녁 7시가 되자 참가자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종이와 연필을 펼쳤다.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고 서로의 글을 듣고 의견을 나누는 방식이 프로그램의 중심을 이뤘다. 세 차례 수업을 마친 뒤에는 참가자들이 쓴 글을 모아 작은 책 한 권을 만들 예정이다.
현장에는 저녁 시간에 맞춰 참치주먹밥과 음료도 준비됐다. 아이들은 주먹밥을 먹으며 연필을 쥐었고, 어른들은 턱을 괸 채 문장을 고민했다. 누군가 글을 읽으면 주변 사람들은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크고 화려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책과 사람을 매개로 세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책과 사람을 잇는 소애진 청년활동가
이번 자리를 마련한 소애진 청년활동가는 광양에서 자녀를 키우며 독서모임과 광양학부모연합회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독서모임은 2019년에 시작해 7년째 계속하고 있다.
소 활동가는 스물세 살에 결혼한 뒤 한동안 주부로 생활했으며,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독서모임을 오랫동안 이어오면서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그 답으로 책과 사람이 함께 모이는 독립서점을 떠올렸다.
그가 지향하는 활동은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독서모임 회원들은 회비를 모아 광양고등학교와 광양여자고등학교, 하이텍고등학교에 각각 1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소 활동가가 미혼모들에게 큰이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회원들도 취지에 공감해 함께 나눔에 나섰다.
아이들이 직접 고르는 책 한 권
월인담화에서는 더 많은 아이가 책을 접할 수 있도록 책 사주기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장학금이 일부 학생에게 전달되는 방식이라면, 책 사주기 프로젝트는 보다 많은 아이와 책을 나누기 위해 마련한 활동이다.
운영 방식은 어른들이 먼저 책값을 기부하고, 아이들이 공간을 찾아와 원하는 책 한 권을 직접 고르는 형태다. 기부 금액은 2만 원이나 5만 원 등 참여자가 정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은 아이가 부모의 조언을 받지 않고 스스로 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소 활동가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고른 책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과 호기심에 따라 책을 선택하도록 돕겠다는 취지다. 이는 단순히 책 한 권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를 간직하는 경험에 의미를 둔 활동이다.
마음을 움직인 두 권의 책
소 활동가가 꼽은 인생 책은 파울로 코엘료의 아처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다. 특히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담긴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는 문장이 깊은 울림을 줬다고 전했다.
무언가를 놓치지 않으려 단단히 붙잡고 살아왔던 시간 속에서, 삶의 모든 것이 선물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새롭게 받아들였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경험은 아이들이 더 이른 시기부터 다양한 책을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책을 통해 자신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넓힐 수 있다는 믿음이 독서모임과 나눔 활동의 바탕이 됐다.
세 번의 글쓰기로 만드는 작은 책
같이 한 문장, 마을을 잇는 글쓰기는 소 활동가의 설명에 따르면 2026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공모사업으로 마련됐다. 수업은 최미경 시인과 함께 모두 세 차례 진행된다.
참가자들은 수업에서 각자의 생각을 글로 옮기고, 완성한 문장을 직접 읽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최미경 시인은 학생들의 글을 살피며 수업을 이끌었다. 아이가 자신의 글을 또박또박 읽는 동안 어른들은 곁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연령에 따라 역할을 나누기보다 모든 참가자가 한 사람의 글쓴이이자 독자로 참여하는 모습이었다.
아이의 한 문장과 어른의 한 문장, 이웃의 한 문장이 모여 마을의 기록이 된다. 프로그램이 내세운 ‘마을을 잇는 글쓰기’는 바로 이 과정을 가리킨다. 서로 다른 세대가 같은 자리에서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존중하는 경험이 작은 책의 바탕이 된다.
동등하게 의견을 나누는 마을
소 활동가는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없으며 반드시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누군가가 위에서 지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의견을 주고받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글쓰기 프로그램 역시 이 같은 생각을 반영했다. 아이와 어른 가운데 어느 한쪽이 가르치고 다른 한쪽이 따르는 구조가 아니라, 모두가 자신의 문장을 쓰고 서로의 글을 듣는다. 현장에서는 어린 참가자가 쓴 글도 어른의 글과 같은 무게로 다뤄졌다.
글을 읽는 아이 곁에서 어른들이 집중해 듣는 장면은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방향을 보여줬다. 한 문장을 완성하기까지 참가자들은 각자의 속도로 고민했고, 발표가 시작되면 서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글쓰기는 개인의 작업을 넘어 이웃을 이해하는 매개가 됐다.
광양읍 독립서점으로 이어질 계획
소 활동가는 2027년 광양읍에 독립서점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광양읍에는 아직 독립서점이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독립서점 준비에는 소 활동가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이 함께하고 있다.
함께하는 이들은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꼼꼼하게 채우며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다. 한 사람에게 의존하기보다 여러 사람이 역할과 의견을 나누는 방식은 현재의 독서모임과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이어온 협력의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책 사주기 프로젝트도 새 독립서점에서 계속할 예정이다. 책을 판매하는 공간에 머물지 않고, 아이들이 직접 책을 고르고 주민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로 이어가겠다는 구상이다.
책과 문장으로 찾는 새로운 가능성
소 활동가는 광양을 자녀를 키우면서도 제2의 인생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도움을 청하며 손을 내밀 때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첫 수업 현장에서는 책 한 권과 간단한 먹거리, 참가자들이 함께 쓴 문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했고, 어른들은 그 목소리를 존중하며 들었다. 어른 역시 자신의 고민을 문장에 담아 다른 참가자와 나눴다.
세 차례 수업이 모두 끝나면 광양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책이 완성된다. 각각의 문장은 짧을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삶과 생각이 모이면 한 마을의 기록이 된다. 같이 한 문장은 글쓰기를 통해 세대를 잇고, 주민이 서로를 이해할 기회를 넓혀가는 공동체 프로그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