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전어배 200년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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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전어배 200년의 흔적

가을철 고소한 맛으로 알려진 전어는 광양만과 망덕포구의 오랜 어업 역사를 품고 있다. 망덕포구 외망마을은 망덕의 옛 이름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이곳 이정표 인근에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와 함께 진월 전어잡이의 유래를 소개하는 기록이 마련돼 있다.

현지에 남은 기록을 따라가면 광양 전어잡이의 시작부터 전통 어구, 어선의 변화, 선원들의 역할, 활어 유통에 이르는 흐름을 차례로 확인할 수 있다.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어잡이

진월 전어잡이의 시작은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존해 있던 70세 이상 전어배 사공과 선주, 선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확인된 내용이다. 그보다 앞선 시기에도 광양만에서 전어잡이가 이뤄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문헌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생존해 있던 80대 주민들도 그 이전의 전어잡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1970년대 광양만 전어잡이를 담은 자료에는 어부들이 줄을 당기며 작업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 오늘날처럼 장비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여러 사람이 한배에 올라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해야 했다. 배를 움직이고 그물을 내리는 일부터 잡은 전어를 끌어 올리는 과정까지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이뤄졌다.

칡과 소나무로 만든 전어 그물

초기의 전어잡이에는 목선이 사용됐다. 한 척에는 대체로 6명에서 7명이 승선했고, 주된 어구는 면사로 만든 그물이었다. 기록에는 전통적인 그물 재료를 칡과 피나무, 삼 등의 속껍질에서 얻었다고 설명돼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든 그물은 나일론 그물이 보급되기 시작한 1960년대까지 사용됐다.

면사를 마련하는 과정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동이 필요했다. 먼저 칡을 마디별로 자른 뒤 가마에서 충분히 삶았다. 삶은 칡을 다시 물에 불려 겉껍질을 벗기면 청올치로 불린 칡 속껍질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물레에 돌려 실처럼 뽑아내 그물의 재료로 삼았다.

그물을 질기고 단단하게 만드는 데에는 소나무 껍질이 활용됐다. 소나무 껍질을 절구통에 넣어 잘게 빻은 뒤 큰 솥에서 끓였고, 완성된 물에 면사 그물을 깊이 담가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는 남녀 주민이 함께 참여했다. 많은 사람이 모여 그물을 손질하던 선소 일대의 작업 풍경은 당시 눈에 띄는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전어배의 원조였던 후릿배

광양 전어배의 뿌리에는 후릿배가 있다. 후릿배는 후릿그물을 사용해 물고기를 잡던 배다. 후릿그물은 자루 모양의 중심부 양쪽에 긴 날개가 달리고, 날개 끝에는 끌줄이 연결된 구조였다. 어부들은 그물을 육지나 배 가까이에 던진 뒤 양쪽 끌줄을 당겨 물고기를 모아 잡았다.

당시 돈탁마을 건너편에 자리한 하동의 옛 선소 일대는 황금어장으로 여겨졌다. 이곳에서 후릿배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 선소마을의 김명수 어르신이다. 김명수 어르신은 1904년에 태어나 1989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후릿배를 운용한 대표적인 인물로 기록돼 있다.

1945년 황어잡이와 한 마쪼리 전어배

1945년 망덕 해태조합 앞에 황어 떼가 한데 모여 헤엄치는 일이 있었다. 이를 발견한 김명수 어르신은 후릿그물로 황어 떼를 에워싸려 했다. 그러나 황어가 제방과 바위 주변을 계속 맴돌고 있어 그물을 치기가 쉽지 않았다.

선원들은 적절한 때를 기다린 끝에 그물을 내렸다. 이어 강 건너 하동 고포마을의 꽃밭 등에서 밧줄을 이용해 그물을 끌어당겼다. 그물에 잡힌 황어의 양은 당시 광양 군수가 격려를 위해 현장을 방문할 만큼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명수 어르신은 해방 이후 삼천포에서 배 한 척을 사들였다. 새로 마련한 배와 기존 후릿배를 함께 운용하면서 전어배 한 쌍을 뜻하는 한 마쪼리 전어배를 탄생시켰다. 후릿배를 기반으로 하던 조업 방식이 한 쌍의 배를 활용하는 전어잡이로 이어진 것이다.

전어배를 움직인 사람들의 역할

전어잡이는 한두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어배에는 배를 마련한 선주와 조업을 지휘하는 사공을 중심으로 여러 선원이 탔다. 선원들은 그물을 다루는 위치와 맡은 일에 따라 서로 다른 직함으로 불렸다.

직함주요 역할
선주전어배를 묶어 만든 배의 소유자
사공전어잡이 전체를 이끄는 우두머리
발무상힘이 많이 필요한 줄을 당기는 선원
뒷발무상발무상의 작업을 뒤에서 돕는 선원
살무상그물의 살을 당기는 선원
아바상 또는 다불무상그물 맨 윗부분이 물 위에 뜨도록 당기는 선원
하장배에 탄 사람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선원

잡은 전어를 나누는 기준도 정해져 있었다. 전어 100kg을 잡았을 경우 절반인 50kg은 선주의 몫이었다. 남은 50kg은 선원들이 나눠 가졌으며, 조업을 이끄는 사공에게는 다른 선원의 1.5배를 배분했다. 전어배의 소유와 실제 조업에 참여한 노동을 함께 반영한 분배 방식이었다.

1960년 전어배에 도입된 동력

1960년에는 광양 전어잡이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돛과 노에 의존하던 전어배에 동력이 도입된 것이다. 이 변화를 이끈 사람은 이정마을의 이기철 어르신이다. 이기철 어르신은 1919년에 태어나 1976년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기철 어르신은 마을 이장 등을 지낸 뒤 전어배 선주가 되기 위해 자신의 집 앞에서 새로운 배를 만들었다. 이 배에는 동력 장치가 설치됐다. 그물은 부산 하단의 남양어망에서 구입했고, 필요한 준비를 마친 전어배는 조업에 나섰다.

동력선의 등장은 어장에 도착하는 시간을 크게 바꿨다. 다른 배들이 돛과 노를 이용해 천천히 바다로 향하는 동안 이기철 어르신의 배는 먼저 어장에 도착해 고기를 잡고 있었다. 당시 최신식으로 여겨진 이 배에 타려는 경쟁도 치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람의 힘과 바람에 의지하던 전어배가 동력을 갖춘 어선으로 바뀌는 장면이었다.

전어를 산 채로 옮긴 상진호

전어의 유통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 횟집에서는 죽은 전어를 주로 구이나 무침으로 판매했다. 선소마을의 김용수 어르신은 전어를 산 채로 수송해 수족관에 넣으면 회로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내놓았다.

1937년 선소마을에서 태어난 김용수 어르신은 1980년대 전어배 선주로 활동했다. 그는 물칸과 산소통을 갖춘 별도의 운반선을 마련했다. 최초 운반선으로 기록된 배의 이름은 상진호였다. 상진호는 전어배를 따라다니다가 전어가 잡히면 곧바로 받아 횟집까지 산 채로 운반했다.

이 기록은 김용수 어르신을 전어 활어 유통을 시작한 인물로 소개한다. 잡힌 전어를 바로 운반할 수 있게 되면서 구이와 무침뿐 아니라 회로 먹는 방식이 가능해졌다. 김용수 어르신은 2017년에 세상을 떠났다.

망덕포구에 이어지는 전어의 역사

망덕포구와 진월 일대의 전어잡이 역사는 전통 후릿그물에서 한 마쪼리 전어배로, 다시 동력선과 활어 운반선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는 후릿배로 이름을 알린 김명수 어르신, 동력 전어배를 만든 이기철 어르신, 활어 운반에 나선 김용수 어르신을 비롯해 이름이 모두 전해지지 않은 사공과 선원들의 노동이 있었다.

칡 속껍질을 실로 뽑고 소나무 껍질을 끓여 그물을 손질하던 시절부터 물칸과 산소통을 갖춘 배가 전어를 운반하던 시기까지, 전어잡이의 방식은 계속 달라졌다. 그러나 배 위에서 역할을 나누고 그물을 함께 끌어 올렸던 공동 작업의 기록은 망덕포구와 광양만의 전어잡이 유래 속에 남아 있다.

광양 전어의 역사는 한 가지 음식의 유래에 머물지 않는다. 전어를 잡는 도구와 배, 선원들의 역할, 분배 방식, 운송 방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지역 어업의 기록이다.

광양 전어배 200년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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