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매천 황현 생가에서 만난 절명시의 울림

광양 매천 황현 생가에서 만난 절명시의 울림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계절, 광양시 봉강면 서석길에 자리한 매천 황현 선생의 생가를 찾았다. 이곳은 나라를 잃은 아픔 속에서도 굳건한 지조와 학문적 정신을 지킨 한말의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사상을 느낄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생가로 들어서는 돌담길에는 매화 향기가 머무는 듯한 정취가 감돌고, 장독대와 매화꽃을 그린 벽화가 방문객을 반긴다. 벽 한편에 적힌 글귀는 선생의 깊은 뜻을 전한다. "실학이 없으면 농민이 먼저 병들고, 백성의 일을 못 본 척하는 사대부가 어찌 사민의 으뜸이 되겠는가"라는 문장은 당시 사회 현실에 대한 선생의 통찰과 백성을 향한 진심을 엿볼 수 있다.
매천 황현의 호는 매화처럼 추운 겨울을 견디고 가장 먼저 향기를 피우는 매(梅)와 맑은 샘물(泉)을 뜻한다. 그의 집 당호인 매천헌(梅泉軒) 아래에는 "종덕부종목(種德不種木)"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는 "덕을 심고 가꿀 뿐 나무는 심지 않았다"는 뜻으로, 물질적 재산보다는 덕을 쌓는 데 힘쓴 그의 청빈한 선비 정신을 보여준다.
1888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황현 선생은 부패한 정치에 타협하지 않고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은거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고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통해 당대 역사를 기록했다.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중국으로 망명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7년에는 호양학교를 세워 신학문 교육에 힘썼다.
1910년 8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소식을 접한 황현 선생은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했다. 생가 마당에 세워진 시비 앞에서 그의 시구를 읽으면 당시의 비통한 심경이 전해진다.
| 鳥獸哀鳴海岳嚬 |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
| 槿花世界已沈淪 | 무궁화 온 세상(조선의 국토와 민족)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
| 秋燈掩卷懷千古 |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
| 難作人間識字人 |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
특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렵기만 하구나"라는 구절은 나라가 망한 현실 앞에서 지식인으로서의 무력감과 부끄러움을 담아낸 절절한 성찰이다.
황현 선생은 벼슬을 지내며 녹봉을 받은 신하는 아니었기에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유서에는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길러온 지 오백 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라고 적었다.
매천 황현 선생의 생가를 돌아보며, 그의 굳건한 절개와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정보와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지식을 단순한 개인적 성공의 도구로만 소비하지는 않는지, 진실과 정의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지성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광양의 고즈넉한 흙담길 끝에서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매천 황현 선생의 서늘한 기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매천 황현 선생 생가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서석길 18
